9.
날은 이미 오후에 가까웠고 거리는 무척 고요했다—— 이 긴 골목은 해질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어난다. 비루먹은 개가 하품하는 것과 길고양이들의 발정난 울음소리 말고는 한 여인의 욕을 하는 소리만이 골목을 맴돌았다.
"……며칠을 더 기다려? 너 스스로 벌써 며칠을 끌었는지 셈을 해봐. 어제 찾아갔을 때는 감히 집에 없는 척하고! 사내가 하루 종일 거리에 나와 일을 하진 못할 망정 집에서 폐지나 써대고 말이야……. 팔릴 때까지 기다려? 언제 반 장이라도 판 적 있어? 네 아래층의 쓸모 없는 놈들도 너보다 많이 벌어! 오브라이언, 네 상자는 여기 저당 잡아 둘 거야, 오늘 만약 돈을 내지 못하면 내가 전부 태워버릴 줄 알아!"
말이 떨어지자 한 젊은 남자가 비틀거리며 녹색으로 칠한 대문에서 밀려 나왔다. 뒤이어 퍽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대문이 그의 앞에서 세게 잠겼다. 떨리는 것은 처마 위의 새들 뿐만이 아니라 남자의 코 위에 걸린 안경도 있었다.
오브라이언은 굳게 닫힌 대문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안경을 주워 옷자락으로 대충 닦고 다시 걸쳤다. 그는 집 주인과 하루 종일 실랑이를 하여 이미 기진맥진했고 어디 가서 쉬고 싶었지만 구석에는 어젯밤 술에 취해 떠난 손님들이 남긴 잡동사니 아니면 아직 버리지 않은 주방 쓰레기라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그는 가만히 있을 곳이 없어 바보처럼 처마 밑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속에서 열이 났다. 어제 점심에 먹은 남은 밥이 마지막으로 목구멍을 넘긴 음식이었다. 만약 오늘 저 여자가 집 문을 부수지 않았으면 그는 대극장에 한 번 더 가려고 했는데 지금은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저당으로 잡히지 않았더라도 원고를 넘길 수 있을지 없을지……." 오브라이언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돈…… 돈…… 어디서 돈을 만들지……."
그의 주머니에는 손가락을 지나가는 찬 바람 외에 열쇠 하나 뿐이었다. 이 열쇠는 오브라이언의 집 대문을 여는 것이 아닌 일 년 내내 바깥에 나가 있는 이웃이 그에게 맡긴 것이었다. 오브라이언은 열쇠를 주머니에서 꺼냈고 그는 저도 모르게 열쇠의 단조로운 무늬를 더듬었다. 순간 좋지 못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웃의 침대 밑에는 어두운 칸이 하나 있는데 그는 예전에 상대가 거기에서 돈을 꺼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여기까지 떠올리자 오브라이언은 얼른 몸을 떨었다.
"안 돼, 안 돼." 남자는 얼른 고개를 흔들며 자신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그런 일을 하면 내 펜 아래의 비열한 소인들과 무슨 차이가 있지?" 그는 급히 두 걸음 걷다가 또 중얼거렸다. "내가 차용증을 쓰면? 한 달만 빌리고, 한 달 안에 꼭 모아서 갚는 거야. 차용증은 그의 침대 위에 두거나 아니면 그가 돌아오면 직접 주거나……."
"누구?"
갑작스러운 물음에 오브라이언은 깜짝 놀라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이상한 비명을 질렀다. 청년은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며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의 이웃이 그에게서 두 걸음 떨어진 곳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보고 있었다.
"……해, 해련." 오브라이언은 억지웃음을 지어보였다.
상대의 표정과 목소리가 너무 이상하여 해련은 저도 모르게 그를 더 살폈다. "길에서 뭐해?"
"나는……." 오브라이언은 입을 벌렸다. "난 영감을 찾으려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대사 몇 개가 떠올라서 중얼거린 거야. 너는 왜 소리도 하나 안 내고 그래, 놀랐잖아."
"나는 길을 걸을 때 항상 소리를 안 내잖아. 네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해련은 신경 쓰지 않았고 오브라이언을 향해 손을 뻗어 열쇠를 달라는 표시를 했다. "너도 쓰레기더미에서 산책하지 마. 올라 와."
오브라이언은 더듬더듬 대꾸하고 손바닥의 땀에 젖은 열쇠를 해련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다가가고 나서야 해련의 뒤에 한 사람이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상대는 진작 그를 알아차린 듯 그에게 호의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오브라이언은 곤혹스러워하며 말했다. "이쪽 분은?"
"그는……." 해련은 말문이 막혔고 자신의 책벌레 이웃에게 방정란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시원스레 말했다. "내 친척."
"오!" 오브라이언은 얼른 이 낯선 동주 사내에게 인사했다. "저는 오브라이언이라고 하고 작가입니다. 해련의 이웃이죠."
"방정란입니다, 해련의 사촌 형——으!"
그는 해련에게 발을 밟혔다.
해련은 열쇠를 받은 뒤 대문을 열지 않고 방 옆쪽으로 돌아가 묶인 사다리를 내려 두어 차례 사다리를 밟아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벌써 반 년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이층짜리 작은 건물의 옥상 위에 지어진 창고에 지나지 않았다. 해련은 방문을 밀어 연 순간 잇달아 재채기를 했고 방 안에서 나는 곰팡내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손을 흔들어 먼지를 날리며 서둘러 방 가운데 지붕 위의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방정란은 이때 따라서 옥상에 올라왔고 사내는 눈앞의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곳을 살펴보더니 잠시 후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너…… 여기 사는 거야?"
"아니면? 내가 어디 살아야 될 것 같은데? 황궁?" 해련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홍류항을 나서자 그의 고용주는 양아치보다도 더 시정잡배처럼 웃으며 좀도둑이 슬쩍한 것이 그의 모든 숙박비이며 그는 지금 땡전 한 푼 없고 남은 돈은 모두 계획에 따라 지출해야 하니 만약 해련이 그를 도와 지갑을 되찾아주지 않으면 해련과 한 침대를 쓰는 것도 괜찮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가 이 낡은 곳을 보고 얼른 생각을 고쳐먹고 멀리멀리 꺼졌으면 좋겠다. 해련은 잇달아 재채기를 하며 생각했다.
방은 낮고 좁아서 세 명의 사내가 들어오자 거의 남은 공간이 없었다. 방정란은 심지어 살짝 손을 들어 머리 위를 받치고 나서야 자신의 머리가 대들보에 부딪히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곁의 의자 위의 먼지를 만지자 손가락은 곧장 원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방정란은 고개를 흔들고 감히 앉지 못했다. 다른 쪽의 해련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철판처럼 굳어진 걸레와 대야를 가져오더니 방 구석으로 걸어가 나무 판자를 밀어냈고, 그러자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드러났다. 청년은 저벅저벅 아래층으로 내려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돌아와 부지런하게 청소를 시작했다.
남겨진 두 사람은 조금 어색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오브라이언은 구석에 움츠러들어 해련이 말하는 "친척"을 몰래 살폈고 마음 속으로는 자못 의심을 품었다.
이 사람은 해련처럼 잘생겼기는 했으나, 같은 잘생김은 아니었다. 해련이 삼 년 전 이곳으로 이사왔을 때 오브라이언은 자칫 이 소년이 아래층의 그 사내와 여인들과 같은 장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뻔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상대가 지붕 위에 앉아 말 한 마디 없이 칼을 갈고 있던 모습은 밤중에 일어난 오브라이언을 놀라 요의마저 사라지게 했다.
"나는 싸움꾼이야." 그의 이웃은 말하며 그를 향해 칼을 빛냈고 칼 끝은 머리 위의 달보다도 둥글었다.
이런 가난한 싸움꾼에게 어떻게 정교하게 차려입은 극장의 주연배우처럼 잘생긴 친적이 있을까? 거기다 이 사촌 형은 동생이 이런 곳에 사는것을 보고도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다. 보통은 마음아파 하지 않나? 아니면 그가 사실 동생이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가족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것일까? 삼류작가 오브라이언은 궁리했고 마음 속에서 치정 살인과 음모, 유산 상속, 우여곡절이 뒤섞인 막장드라마가 펼쳐졌다.
해련은 자신이 이웃의 머리속에서 이미 "바깥으로 떠도는어느 이방 귀족의 사생아"라는 기괴한 설정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오브라이언을 밀치고 문틀도 닦았다. "요즘 어때?"
"응? 나, 나?" 극본이 도중에 중단되자 오브라이언은 정신을 차렸다. "별로 좋지는 못해, 일이 없어졌어."
"왜?"
"그 집 딸이 혼인을 준비하고 있어서 선생님이 필요가 없어진 거지." 자신의 최근 실직을 언급하자 오브라이언은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여자 아이들이 혼인을 한 뒤에도 뭘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남편이 교육하면 충분하대."
"음……." 해련은 애매하게 대답하며 걸레를 쥐어짠 뒤 침대를 닦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쩔 생각인데?"
오브라이언은 또 삼십 분 전 여인의 그 욕설을 떠올리며 침을 삼켰다. "지금은…… 상황을 봐야지, 그때 그때."
"아니면 상선의 회계를 해보는건 어때? 내가 소개해줄 수 있어."
"아냐, 아냐. 요즘 상선에 오르는 사람들은 다 목숨 귀한 줄을 몰라, 나는 그럴 배짱이 없어." 오브라이언은 급히 손을 흔들었다. "듣자하니 최근 이 년 간 16도에 그 어느 때보다 해적이 창궐한 상태라고 해. 해련, 너도 바다에 나갈 때는 조심해."
해련은 동작을 멈추었고 대답하지 않았다. 방정란은 16도를 가로지르는 꼬마 해적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지었다.
"스스로 일을 찾을 수 있어? 문제 없겠어?" 해련이 또 한 마디 물었다.
오브라이언은 순간 주저했다. "……괜찮아."
"당신 안색은 괜찮은 것 같지 않은데요." 줄곧 입을 열지 않던 방정란이 갑자기 말했다.
해련은 손 안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오브라이언을 보았다.
방정란에게 걱정거리를 지적당하자 오브라이언은 순식간에 낯빛이 붉어지더니 두 손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고,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여 아예 등 뒤로 감추어 버렸다. 남자는 힘없이 변명했다. "정말 괜찮습니다……."
"어려운 일이라도 있어?" 해련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오브라이언은 할 말이 없었다.
젊은 작가는 두 사람이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 거의 도망가고 싶을 지경이었으나, 하필이면 해련이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숨을 곳이 없어진 남자는 그저 더듬거리며 입을 열 뿐이었다. "……내가 금령화 부인에게 세 달치 방세를 빚졌어. 나도 내고 싶어, 대극장에 보낸 원고가 통과되기만 하면 큰 돈을 받을 수 있어. 하지만 그녀는 오늘 내 설명은 아예 듣지도 않고 내 원고를 압수했어. 내가 급히 일을 찾으려 했는데 진흙구泥巴区에 사는 서생은 문자와 관련 된 일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지. 또 부두에서 닷새를 머물렀는데 결국에는 모래를 짊어질 때 다리를 다쳐서 번 돈이 그대로 의사의 손으로 들어갔고……."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대사를 다 외우기도 전에 무대로 내몰린 어릿광대 같다고 생각했다. 뱉어내는 모든 음절이 우스꽝스러웠고 주술 역시 뒤바뀌어 혼란스러웠다. 그는 당황했고 심지어 해련에게 자신의 발목 위의 가느다랗고 흰 바늘 자국까지 보여주려 했다.
"시도해봤어, 여러 번 시도해봤어." 오브라이언의 마지막 몇 자는 완전히 풀이 죽어 거의 비음이 되었다.
"얼마가 필요하죠?"
이 질문을 한 것은 해련이 아니었다. 오브라이언은 의아한 듯 그 잘생기고 낯선 동주인을 바라보았고 상대는 여전히 그 온화하고 우아한 웃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방정란은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얼마가 필요하죠?"
어쩌면 방정란의 옷깃 위의 은실과 허리춤의 검의 칼자루의 보석이 오브라이언의 눈을 반짝이게 했던 것인지, 그는 등 뒤의 손아귀를 힘껏 꼬집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삼…… 삼십 육 은량이요."
"작은 성의이니 갚을 필요 없습니다." 방정란은 말하며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그에게 주려 했고, 오브라이언은 황급히 제지했다. "어떻게 그래요! 제가 빌리는 걸로 하지요, 이자를 말씀해주시면 지금 가서 차용증을 쓰겠습니다."
방정란은 생각하더니 손을 부딪치며 말했다. "그러시죠, 당신이 제 동생의 이웃인 걸 봐서 분명 평소에 그를 잘 돌봐주셨을 테니 이자는 없는 걸로 하죠. 대출 기한은…… 반 년으로 하고, 그때가 되면 내게 갚을 필요 없으니 그대로 내 동생에게 주면 됩니다. 내 물건이 바로 그의 것이니까요."
"잠깐……." 해련은 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감사합니다, 방 선생님!"
오브라이언은 상대가 이렇게 후하고 너그러울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흥분하여 눈이 밝아졌고 연달아 감사 인사를 하며 자신이 가능한 한 빨리 갚을 것이라고 약속했고, 말하며 다급히 종이와 펜을 찾으러 뛰쳐나가다가 해련을 지나칠 때 문턱에 발이 걸릴 뻔했다.
그 사람이 기와조각을 밟으며 떠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방정란은 웃었다. "네 이웃이 정말 재미있군."
"그런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해련은 걸레를 내던지고 화살처럼 빠르게 방정란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상대는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그에게 밀쳐져 몇 차례 뒷걸음질치다 퍽 하고 벽에 부딪쳤고 먼지가 두 사람의 머리와 얼굴에 내려앉았다.
"너 이전에 분명히 돈 없다고 했잖아." 해련은 이를 박박 갈았다.
"거짓말이야." 방정란이 말했다. "거기다 나는 숙박비가 없다고만 했지."
"그리고 모든 돈이 다 지출 계획이 있다고 하면서 절대 예산을 초과해서 지출하지 않을 거라고도 했어."
"이것도 계획된 지출이야." 방정란은 해련보다 머리 반 개 정도 키가 컸기에 그는 눈을 내려서야 상대의 분노가 담긴 눈동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인정으로 네 충심을 사는 거지. 좋잖아."
"방정란, 내가 알아서 내 친구를 도울 거야, 네가 끼어들 필요 없어. 나는 네가 이렇게 뒷공작하는 게 더 싫어."
"내가 정말로 뒷공작을 한다면 너는 지금 이렇게 내 옷깃을 잡을 기회조차 없을 거야, 해련." 방정란은 말하며 해련을 향해 가볍게 숨을 불었다. "……네 속눈썹에 먼지가 앉았네."
"내 이름 부르지 마. 나도 다시는 네 괴상한 말을 믿지 않을 거야." 해련은 상대의 아이를 어르는 듯한 어조와 농담 같은 동작에 화가 나 눈을 부릅뜨며 한 글자 씩 힘을 주어 말했다. "지금 당장 여관으로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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