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원작/해중작海中爵

해중작 - 17. 짐승우리와 야수

사장은 해련을 불러내었고 어느 암투장에서든 들을 수 있는 간략한 규칙을 알려주었다. : 네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상대를 공격해라. 주먹, 다리, 이빨, 이마…… 등으로 그를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해라. 만약 세 명을 버틴다면 네가 오늘 밤의 중심이 될 것이고, 이때 무기를 들고 가장 자극적인 싸움으로 마무리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물론,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이상 한쪽이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뭘 들고 가든 상관 없어, 여기는 뭐든 다 있거든. 너클, 장총, 동주검, 북막도……." 사장이 소개했다. "하지만 화총은 안 돼, 손님을 다치게 할 수도 있고 보는 맛이 없어. 북막의 신 사수도 완력과 시력이 필요한데, 총이라는 건 손가락만 움직이면 사람의 몸에 구멍이 날 텐데, 무슨 재미가 있겠어. 안 그래?"

"규칙은 다 알아, 하나만 확인하지." 해련은 사장의 잔소리를 끊고 자신의 비수를 뽑았다. "내 무기를 가져갈 거야, 괜찮아? 내 물건이 가장 손에 익어."

해련의 비수는 남경의 자객들이 자주 쓰는 비수와는 살짝 다른데, 손잡이가 곧고 칼등은 흐르는 물결처럼 굽어 있었으며 손잡이에는 어떤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나 해련이 움켜쥐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비수의 위아래에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칼날은 눈에 빛이 흐르는 것처럼 빛나 사람의 그림자를 비추어 낼 수 있을 정도였고, 가운데 혈조는 은실이 손잡이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설령 아무 것도 모르는 이라도 이 물건이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장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칼날과 해련의 얼굴을 몇 바퀴 돌았고, 잠시 뒤에 그는 옆에 있는 탁자를 가리켰다. "당연히 가능하지, 먼저 한쪽에 뒀다가 이따가 가지고 가라."

해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칼을 한쪽에 놓아두고 손목을 돌리며 경기장 중앙으로 향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미세한 소동이 일었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해련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들의 시선 속 이 신인은 조금도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일 사람 같지 않았다. 청년은 잘 생기기는 했으나 이곳이 대극장도 아니고, 잘생긴 얼굴은 멍이 들고 부을 때 더욱 큰 학대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 외에는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해련은 소동 속에서 힘 없이 어깨를 늘어뜨렸고 입가는 다물려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곡선을 그렸다. 그는 담담항 표정이었고 겁을 먹지도 긴장하지도 않아 마치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겪게 될 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의 돌아가신 선생님이 여기에 서있어야지만이 해련의 반쯤 드리운 눈동자 속 깊숙이 억누르고 있는 흥분의 빛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22.

 

안타깝게도 15분 뒤 흥분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제가 당신의 말을 믿었어야 했어요. 해련은 두 번째 상대를 엎어트린 뒤 속으로 생각했다.

난 정말 남들을 괴롭히고 있는 거야.

 

그가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상대를 다치게 했던 것에 비해 그의 몸의 상처들은 어린 아이가 싸움질을 할 때 얼굴을 긁힌 것처럼 소소한 것이었다. 해련은 입가를 핥고 혀 끝의 비린내를 맛보며 흥미가 가신 채 자신의 다음 상대를 바라보았다.

세 번째로 무대에 오른 것은 자신과 충돌을 일으켰던 그 사내였다. 남자는 이전의 동료의 말에 놀랐는지 아니면 재빠르게 두 명을 쓰러트린 해련의 효율에 놀랐는지, 이 모래밭에 들어가자마자 일찍 죽으면 일찍 환생한다는 마음으로 해련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이러한 무모한 공격에 해련은 입술을 삐죽였고, 그는 교묘하게 옆으로 피하더니 동시에 손은 이미 상대의 뒤통수를 향해 휘둘렀다. 맞붙은지 네다섯 합이 되기도 전에 사내는 발이 걸려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넘어졌고 먼지가 순식간에 전신을 뒤덮었으며 오른쪽 얼굴은 지면에 처박혀 왼쪽 광대뼈의 상처와 대칭을 이루었다.

"어떻게 팔을 잡아뽑는지도 알려줘야 해?" 해련은 시끄러운 환호성 속에서 물었다.

이미 팔을 들 수 없게 된 남자의 목구멍에 먼지가 끼었고, 쉰 목소리로 하는 애걸과 부서지는 기침 소리가 한 군데 섞여 조금 가련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해련 역시 악인은 아니라, 상대가 일어나지 못하기만 하면 되는 규칙이라면 그 역시 정말 사람의 목숨을 거두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는 손을 풀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관중들이 상대가 이미 반격할 힘이 없는 것을 보게 했다. 하지만 해련의 이러한 자비는 되려 관객들을 불만족스럽게 했다. 그들은 세 번째 라운드가 되어서도 인명 사고가 나지 않았음을 원망했고 해련이 그 사람의 목뼈를 밟아 부러트려야 한다고 종용했다. 고함 소리가 해련의 왼쪽 귀로 들어갔다가 오른쪽 귀로 빠져나왔고 누군가는 그를 향해 동전을 던졌으며 이 작은 물건들이 짤랑짤랑 경기장으로 떨어졌고 몇 개는 해련의 몸에 맞기도 했다.

 

"이건 우리야." 아크는 머리 위를 가리켰다.

"우리?"

"안에 갇힌 건 전부 짐승이지."

"저들도 포함해서요?" 해련은 앞쪽의 열광적인 관중들을 가리켰다.

"당연하지." 아크가 대답했다. "그들은 가운데 울타리에 둘러싸인 것이 짐승이고 그들은 짐승의 싸움을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문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사람은 없어, 짐승 뿐이지."

"하지만 저희 둘도 문 안에 서 있는데…… 아이고!" 해련은 이마를 한 대 맞았다.

 

해련은 동전으로 맞은 곳이 주먹으로 공격 당한 부위보다 더 아프다고 느꼈다. 비록 그의 선생님은 개자식이었지만, 개자식도 가끔씩 진실한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 안에 서 있기만 하면 관객이 가지고 놀게 제공되는 짐승이고, 장난감이라는것이었다. 이 작디 작은 원 안에 뿌리내린 죽고 죽이는 싸움과 전투는 생존과는 무관하며 영광과는 더욱 무관했다. 그저 피비린내를 맡고 흥분하는 짐승들이 두어 번 더 침을 삼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승냥이"나 "날카로운 이빨"처럼 이 사람들에게 알랑거리며 바보 같은 웃음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청년은 입을 꾹 다물었고 사장의 앞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조금 빨라졌다. "마지막 무기 싸움 차례지? 칼을 내게 줘."

"자." 사장은 물건을 넘겨주었다.

해련은 슬쩍 보았다. "이건 내 칼이 아닌데."

"이게 바로 네 칼이야." 사장이 말했다.

해련의 손 안의 것은 반 정도 녹이 슨 철이 나무 손잡이에 꽂혀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칼날 위의 반짝이는 두 개의 구멍은 어린 아이가 이갈이를 할 때의 벌어진 앞니처럼 그를 향해 조롱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약 이 물건이 비수라면 그야말로 "비수"라는 글자를 모욕하는 것이다.

해련은 반복했다. "내 칼을 줘."

"칼을 가지고 왔었나? 왜 나는 모르지."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

"무대에 올라, 손님들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자고."

사장의 손에는 어느새 총이 하나 늘어나 있었고 둥근 총구는 청년의 견실한 허리에 딱 붙어있었다. 그날 밤 방정란이 해련의 이마에 입 맞추었던 그 단발총과 무척 닮아 있었다.

그 한 순간, 해련의 머리에 일렁이던 악의 조류는 거의 폐부를 뚫고 흉수가 되어 눈 앞의 파렴치한 얼굴을 찢을 정도였다. 이 사람은 방 씨 놈도 아니고, 머리가 내장으로 가득 찬 무뢰배일 뿐이다. 해련은 상대가 총을 쏘기 전에 상대의 목을 찢을 수 있는 열 가지 방법이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독전갈 호박은 아직 관중석에 있었고 한 쌍의 눈만 그를 지켜보고 평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가 앞으로도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싶다면 지금은 얌전히 그들의 눈꺼풀 아래의 장난감이 되어야지, 더는 어떤 도발적인 행위를 해서는 안 됐다.

청년은 이를 악물고 긴장을 풀었다. 그는 검은 눈동자를 드리워 물러날 뜻 없는 총을 응시하더니 잠시 후 문득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후 해련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녹이 슨 쇠붙이를 든 채 고개를 돌려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그가 겁나지 않으세요?" 해련이 떠난 뒤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뭐하러 시체를 무서워 해?" 사장은 웃으며 반문했다. 오늘 해련의 활약은 그의 예상을 뛰어 넘었지만, 아직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가령 그가 건네 준 썩은 비수처럼.

사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은 '그 사람들'이 보낸 거야. 분명 오늘 여기서 죽으라는 거지. 나도 바보가 아닌데 당연히 '그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어야지 않겠냐."

"그러면…… 누가 그의 상대가 되게 할 건가요?"

사장은 생각했다. "열마더러 도끼를 고르라고 해라. 그의 스폰서가 오늘 큰 돈을 냈으니 어쨌든 나와서 피를 보게 해야지."

상대방는 대답하고 문으로 들어가 열마를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정교한 강철 도끼를 들고 걸어 나왔다. 그가 장내에 들어가기도 전에 관중석에서 눈치 빠른 사람이 열마의 상징인 산발을 알아차렸다. "열마야!"

말소리가 떨어지자 어둑한 암투장의 온도가 몇 도 올라갔고 사람들은 이 암투장에서 항상 승리를 거둔 이의 이름을 외쳤다. 그의 흉악한 얼굴이든 아니면 손 안의 중량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묵직한 도끼든, 두 사람 사이의 힘과 무기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어져서 펼쳐지는 것은 높은 확률로 일방적인 학살이 될 것이었고, 벌써부터 누군가는 만약 열마가 해련의 목을 산 채로 잘라낼 수 있으면 그에게 금화 한 주머니를 상으로 주겠다고 외쳤다.

사장은 관중석의 분위기가 그가 바라던 대로 최고조에 이르렀음에 무척 만족했다. 그는 총을 거두고 해련의 비수를 꺼내 더듬어 천천히 감상하더니 말했다. "이렇게 좋은 칼을 저 녀석에게 주는 건 너무 아깝지. 산 사람이 쓰는 게 나아……." 남자의 중얼거리는 소리는 점차 작아졌고 눈동자는 되려 천천히 커졌다. "이건……."

몇 걸음 떨어진 경기장에서 그의 눈 속에서는 죽을 게 분명하던 젊은이가 옷을 벗었다.

 

해련은 스무 살을 채운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체격은 아직 소년과 청년 사이에 머물러 있었고 일 년 내내 훈련과 싸움을 쌓아와 마를 곳은 마르고 길어져야 할 곳은 조금도 덜 자라지 않았다. 그는 평소 헐렁한 옷을 즐겨 입고, 그 얼굴 탓도 있어서 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몸이 얇다고 느껴지게 했다.

하지만 사장을 놀라게 한 것은 해련의 몸도, 그의 몸의 얼룩덜룩한 옛 상처도 아닌 청년의 어깨 위의 손바닥 정도 크기의 흔적이었다.

그곳에는 본래 정교한 호랑이 머리 문신이 있었는데 밤의 불빛 아래에서도 희미하게 안료가 살갗에 스며 묘사해 낸 뾰족한 호랑이 귀와 굵고 긴 두 개의 이빨이 보였다. 하지만 호랑이 머리의 다른 부분은 흉악한 낙인으로 덮여 있어 얼핏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벌벌 떨렸다.

검은 거리에는 호랑이 문신을 넣는 건달이 적지 않았으나 이러한 문신은 당시 백호방의 사람들만 갖고 있었던 것이고, 심지어 고위층이어야 했다. 삼 년 전 백호방은 내전으로 인해 피로 씻겼고 수령이 교수형 당하고 남은 핵심 인원들은 죽거나 잡혔을 뿐 아니라, 당시 구몽성 제일의 자객이던 외눈박이 아크 역시 혼란한 가운데 전사했으며 당시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이 현장에 들어섰을 때는 폭우 뒤의 지면을 밟은 것 같았다는 과장된 소문도 돌았다. 그러한 큰 청소에서 도망 나온 물고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남자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손 안의 차가운 비수가 갑자기 인두라도 된 것 같았고, 곧 그의 손바닥을 태울 듯했다.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오직 그 배반의 도화선만이…….

"안 돼…… 젠장……." 그는 모골이 송연해져 입을 열었다. "열마를 내보내선 안 돼!"

 

 

 

'원작 > 해중작海中爵'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중작 - 19. 막을 내리다  (0) 2021.12.14
해중작 - 18. 미친 말  (0) 2021.12.13
해중작 - 16. 암투장黑拳场  (0) 2021.12.03
해중작 - 15. 신선한 일  (0) 2021.11.30
해중작 - 14. 살인  (0) 2021.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