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원작/해중작海中爵

해중작 - 19. 막을 내리다

24.

 

"사람 죽었어——"

관중석 한쪽에서 비명이 터졌다. 해련의 칼은 아직 열마의 가슴에 닿아 있었는데, 이 낡은 쇳조각은 돌과 같은 근육을 그어 녹이 슨 칼날을 상대의 심장까지 들여보내지는 못했다.

해련의 칼보다도 한 걸음 빨랐던 것은, 독전갈 호박의 칼이었다.

여성 파트너의 흰 치마, 가면, 귓가의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피로 가득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벌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높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남성 파트너가 어느 틈에 지목 당하고, 또 언제 목숨을 잃었는지 그녀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호하던 경호원 역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알아차렸을 때는 죽은 자의 커다란 몸은 이미 파트너의 드러난 어깨를 따라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놀라움은 열병처럼 빠르게 죽은 사람의 방향에서 번져나갔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놀라움이 한 걸음 나아가 폭동으로 변하기 전, 대각선 방향에서 다른 비명소리가 대칭적으로 터져나왔다. "사람이 죽었어!"

이렇게 많은 독전갈 호박이 움직였으니, 죽은 것이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누가 지휘할 필요도 없이, 아역과 아가씨, 경호원, 나리들…… 모두가 물보라가 파도의 봉우리를 쫓듯 사람들을 서로를 밀쳤고, 진흙 묻은 맨발이 가죽신을 밟으며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앞뒤를 다투어 출구로 뛰어갔다. 마치 그 아무도 생김을 알지 못하는 독전갈 호박이 마지막에 서 있어서, 뒤떨어지면 칼을 맞기라도 하는 듯했다. 본래 자신의 우리 밖에 위치해 있다고 믿던 관중들은, 가장 잔혹하고 흉폭한 살인을 감상하던 관중들은 피비린내가 그들의 곁에서 흩어지기 시작하자 가장 선량하고 가장 성실한 새끼양처럼 몸을 떨고 엉엉 울었다. 만약 희극 작가가 이곳에 서 있다면 그는 자신의 펜 아래의 우스운 극본에 포복절도 할 것이다.

지금 두 사람만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지 않았다.

설령 오늘 밤 더는 아무도 갈채를 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공연은 반드시 막을 내려 감사를 표해야 한다. 그들 중 한 명은 반드시 오늘 밤의 세 번째 희생자가 되어야 했다.

달빛이 머리 위의 천장에서 새어나왔고 마치 무대 위에서 직원들이 밧줄로 당기는 불빛이 결투장 중앙의 두 사람을 비추는 것 같았다. 열마의 눈동자 속에는 사람을 물어 삼킬 듯한 광채가 어렸다. 남자는 크게 웃으며 몇 번이고 "좋다, 좋아." 했고, 주먹은 되려 아무런 주저 없이 내리쳐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해련이 독전갈 호박의 앞에서 숨길 것이 없었다. 그는 불가사의한 속도로 열마의 주먹을 피하고 동시에 자신의 왼손을 휘둘렀다.

이 주먹은 그대로 열마의 얼굴을 향했고, 반 미치광이에 가까운 사내의 정신은 이미 머리에 흐르는 뜨거운 피로 혼탁해져 있었으나, 오랜 세월 쌓아온 전투 본능은 여전히 그를 채찍질하여 해련의 한 방으로 자신의 우세를 잃지 않게 했다. 해련의 주먹의 각도가 좋지 못하여 그는 그것을 받아낼 수 있었으나 눈두덩이에 고통을 느낀 순간 열마는 처참하게 비명을 질렀다. "아!!"

이것은 그가 익숙하던 둔한 통증이 아니었고, 눈가의 신경이 충격을 입었을 때의 순간의 실명도 아니었다. 이것은 더욱 극렬하고 더욱 차가운…… 마치 저녁 식사 때 아이를 위해 씹기 힘든 마름 열매를 잘라주는것 같았다. 흰색, 홍색, 흑색.

열마의 오른쪽 눈에는 칠흑만이 남았다.

"근육은 단단해도, 눈알은 부드럽지."

자객의 손가락 틈에는어느 틈엔가 칼날이 쥐여 있었다. 썩은 비수도, 사장이 강탈해 간 비수도 아닌, 그가 한 달 전 방정란의 팔뚝을 베었던 것과 같은 대장장이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반드시 몸에 두 개 이상의 무기를 지니고 적어도 하나는 숨겨 둬라. 그렇게 하면 정말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자살은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외눈박이 매 아크가 해련에게 가르쳐 주었던 두 번째 교훈이었다.

 

청년은 조금도 동작을 끌지 않았다. 그는 피가 묻은 칼날을 내던지고 허리에 힘을 주어 무릎을 굽혀 열마를 걷어찼다. 상대는 눈을 감싸고 계속 비명을 질렀고, 미친 듯 기어 일어나 난간에 걸려 있는 도끼를 집으려 했다. 하지만 부상자가 어떻게 귀매의 속도에 비하겠는가? 해련은 한 손으로 도끼의 손잡이를 쥐고 힘껏 난간을 걷어찼으며, 도끼가 틈에서 빠지는 관성을 이용하여 얼른 몸을 돌렸다. 날카로운 칼날은 열마의 피륙과 골격으로 파고들었다. 손 하나가 날아갔다.

해련은 팔이 떨어지는 소리 가운데 도끼를 들고 한 걸음씩 열마에게 다가섰다.

"이 3년 간, 나는 계속 사람을 찾고 있었어."

그의 말은 느려 흡사 교수대 옆에서 사형수에게 마지막 낭독을 하는 망나니 같았다. "나는 이 일을 위해 구몽성의 모든 정보 장수를 알게 됐지만 그들은 다 모른다고 했지. 그날 밤의 양뿔 골목에서, 누가 그 작은 오두막에 들어가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어."

피는 방울방울이 아니라 콸콸 떨어지고 있었다. 열마는 비틀거리며 하하 웃었다. 그에게는 손 하나만이 남겨져 있었는데, 눈을 눌러야 할지 아니면 다른 팔을 눌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는 날 질투했어. 설령 내가 널 아예 모른다고 해도, 설령 그 시절에는 모두가 백호방의 개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해련은 이미 열마의 앞에 이르렀다. 그는 창백하고 못생긴 얼굴을 뚫어져라 주시햇다.

"넌 감히 삼 년 전에 날 미행했으면서도 내게 도전하지는 못하고 네 그 역겨운 물건을……." 해련은 여기까지 말하고 역겨움이 목구멍으로 올라와 거의 헛구역질을 할 지경이었다. 청년은 깊게 심호흡한 뒤에야 말을 이었다. "그 치마는 내가 태웠어, 내 동생은 더는 양뿔 골목에 살지 않아. 그녀는 네가 바라던 모습처럼 진흙 속으로 떨어지지 않았어. 너는 한 마디만 맞았어, 나는 내 여동생을 보물처럼 여겨. 아무도 그 아이를 괴롭히게 두지 않아."

해련은 손을 들었다.

 

커다란 암투장은 텅 비었고 남은 선수들과 교활한 사장도 이전의 혼란 속 도망쳤다. 죽은 듯한 정적이 자리한 공간 속, 유일한 산 사람은 도끼를 한쪽에 떨어트리고 사장이 그에게 준 썩은 비수를 만지작거리다 열마의 도끼로 벌어진 목구멍에 꽂아넣었다.

"이건 너희 권투장 도구야. 빌린 거 돌려준다." 해련이 말했다.

 

25.

 

해련이 권투장에서 나와 아직 오솔길에 들어서기 전, 문득 옆에서 어떤 물건이 굴러와 그의 발치에서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보았는데, 더러운 손가락이었다.

"검지, 방아쇠를 당긴 검지야." 예쁜 목소리 하나가 어둠 속에서 설명했다. 이전에 가면을 쓰고 있던 독전갈 호박이었다. "방금 그가 검지로 널 위협하지 않았어? 우리 우두머리가 널 대신해서 복수했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해련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럼 내 칼은."

"너 진짜 재미없다. 고마워 할 줄도 모르고." 상대는 입을 삐죽였다. "내가 아니었으면 넌 네 칼을 되찾지 못했을 거야."

"당신들이 아니었으면 나는 오늘 암투에 참여할 일이 없었어."

상대는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그제야 내키지 않는 듯 비수를 던졌고 일부러 칼끝을 해련을 향했다. 해련은 익숙하게 잡아 허리춤에 넣었다. 아가씨의 가면 뒤 눈동자가 깜빡였다. "우리 우두머리가 말하길, 네 솜씨가 무척 좋으니 국왕을 위해 일하는데 관심이 없냐던데."

"없어."

"내 예상한 것도 그 대답이었어. 우리 우두머리가 굳이 물어보라고 하더라고, 정말 싫어." 그녀는 혀를 내밀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달빛이 박힌 가면 위의 은빛 가장자리마저도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 조심해야지, 다시는 우리를 마주치지 마. 다음에는 '있다'는 선택 밖에 없을 테니."

독전갈 호박의 웃음소리와 그녀의 그림자는 점차 멀어지고, 해련은 제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침묵한 뒤에야 몸을 돌려 집 쪽으로 걸어갔다.

 

해련은 오늘 밤 무척 지쳐서 돌아가는 길에 몇 번이나 기절할 것 같았으나 결국 억지로 버티며 녹색으로 칠한 대문 옆 사다리를 올랐다. 사다리를 오르는 것 역시 흔들흔들했고, 손이 지붕에 달린 구리못을 잡을 때 위험천만하게 떨어질 뻔 했으나, 다행히 다른 손이 한 걸음 빠르게 그를 단단히 잡아당겼다.

"조심해."

그는 고개를 들었고 먼저 그 사람의 등 뒤의 은색 쟁반처럼 둥근 달이 보였고 뒤이어 그 달빛을 등진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너구나……." 해련은 중얼거렸다.

해련을 잡고 있는 그 두 손은 따뜻하고 힘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더 세게 쥐고 싶었다.

"나야." 방정란이 대답했다.

 

'원작 > 해중작海中爵'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중작 - 21. 다음날 아침  (0) 2021.12.20
해중작 - 20. 힐월절  (5) 2021.12.17
해중작 - 18. 미친 말  (0) 2021.12.13
해중작 - 17. 짐승우리와 야수  (0) 2021.12.09
해중작 - 16. 암투장黑拳场  (0) 2021.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