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해련은 방정란이 사다리 위로 끌어올린 이후에야 지붕 위에 사람 말고도 다른 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두 걸음도 되지 않는 공간에 술 한 병과 좋은 잔 두 개, 간식이 하나 있었다. 술잔은 척 봐도 금령화 부인에게서 빌려온 것이었는데, 간식과 술은 동주인이 어느 술집에서 사온 것 같았다.
해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하는 거야?"
"보다시피, 달 감상을 하고 있었지." 방정란은 웃으며 대답했다. "한 잔 할래?" 상대는 청하며 말했다.
평소였다면 해련은 아마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 거절하며 방 안으로 들어갔을 테지만, 오늘 마주한 일들이 사람을 구역질나게 해서인지 평소 눈에 거슬리던 사람이 조금 거슬리지 않게 되었다. 해련은 손을 흔들고 거리낌 없이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 한 잔 하고."
말을 하고 그는 다른 잔을 쥐려 했는데, 방정란은 그를 막았다. "내가 아래에서 새로 가져다 줄게."
"왜?"
"내가 사고 네가 공짜로 마시는 거니, 어쨌든 내 규칙에 따라야 하지 않겠어?" 방정란은 해련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깐 기다려."
해련은 눈썹을 치켜떴고 드물게 딴지를 걸지 않았다.
잠시 후, 방정란은 새 잔을 가지고 올라왔을 뿐만 아니라, 작은 원통 상자 하나를 해련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연고." 방정란은 대답했다. "내가 동주에서 가져온 거야, 어의 화 씨 집안의 전해지지 않는 비법인데 맨발의 의원을 찾아가 사온 약유보다 분명 나을 거야."
"어떻게 알았——" 반 정도 말하다 해련은 삼켰다. 이걸 물어볼 필요가 있나? 그는 지금 봉두난발에 몸에 걸친 옷은 더러운 걸레가 됐고 입가에는 멍이 들었다. 방금 방정란이 쥐었던 손가락 관절 쪽 상처는 아직 씻지 못했고, 먼지가 혈관 속으로 파고 들어 누가 보더라도 악전고투를 겪은 모양새였다.
방정란은 해련이 상자를 쥐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왜?"
"너 오늘……." 해련의 표정은 무슨 희귀한 동물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어디 갔는지 안 물어봐?"
방정란은 실소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으니 물어볼 게 없지." 그는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남하고 싸움을 했을 때 내 부모님은 내가 어디서 싸웠는지, 누구와 싸웠는지 묻지 않으셨어. 기껏해야 하나를 물어보셨지."
"뭘?"
"누, 가, 이, 겼, 어."
상대의 이 말은 무척 익살스러워 해련은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 우리 구몽의 1호 자객 겸 해적 해련 각하." 사내는 눈을 깜빡였다. "오늘은 누가 이기고 누가 졌지?"
"당연히 나지."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한 잔 마셔야지!" 방정란은 벌써 술을 따라 해련에게 건네주었다.
해련은 술잔을 받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흥이 났어?"
"오늘은 좀 특별하니까."
"특별?"
"보아하니 넌 정말 자신을 동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방정란의 눈매가 휘어졌다. 그가 알려주었다. "오늘은 힐월절缬月节이야."
해련은 멈칫했다가 잠시 후에야 가볍게 아, 했다.
그는 분명 잊었다. 새해를 제외하면 힐월절은 동주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명절이었다. 청년 남녀가 보름달 아래 사랑을 맹세하는 것 외에도 전 집안이 모이는 기념일이었다. 상대가 이렇게 말하자 해련의 머릿속에도 태연성에 있을 때 부모님이 자신을 데리고 교외의 영정호 근처에서 천등을 띄웠던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남경에 온 이후로 이 희박한 기억은 진작 암벽에 묻은 진흙의 흔적처럼 파도에 쓸려 옅은 흔적만이 남았다.
지금은 한밤중이 되어도 주변은 여전히 밝았고, 아래층의 붉은 베일을 덮은 귤색 뷸빛도 우윳빛으로 물들었다. 해련은 이런 달빛 아래 두 사람이 이미 동주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넌 지금 혼자 티수에 있는데 이런 명절을 뭐하러 챙겨?"
"너도 있잖아?" 방정란은 청하는 손짓을 했다. "타향에서 옛 친구를 만났지."
"나하고 넌 친구 아니야." 해련은 중얼거리더니 잔을 받아 홀짝 마셨다.
술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 청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휘둥그레졌다. 그는 놀란 듯 방정란을 보았고 상대는 웃었다. "괜찮지? 수은이 이게 바깥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술이라고 알려줬어. 이름은 경화주인데,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티수의 귀족들이 가슴의 휘장에 의지하여 국왕의 와이너리에서 가져오는 어주 뿐이야."
분명 좋은 술이었다. 거기다 20여 년 간 해련이 마셨던 것들중 가장 좋은 술이었다. 해련은 문인도 아니고 애주가도 아니라 얼마나 좋은지는 말할 수 없었지만 만약 이 물건이야말로 술이 있어야 할 맛이 있다고 한다면 그가 진주술집과 사귀만의 해적 모임에서 마셨던 것들은 냄비 씻은 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해련의 가슴은 까닭 없이 시큰거렸다. 그는 웅얼웅얼 말하고 또 한 모금 마셨다. "너 즐길 줄 아는구나."
"인생은 괴롭고 짧으니 편안하게 있을 수 있을 때는 당연히 편안히 지내야지."
"그러면 왜 좋은 데 살지 않고 이런 곳에 살아." 해련은 그를 바라보았다. "네 수준이라면 백조구에 가서 부자 행세 하는 것도 전혀 문제 없는데."
"여기는 편안해." 방정란 역시 마셨다. 그는 이전에 홀로 반 병을 비웠고 지금은 말을 할 때의 끝음을 평소보다도 반 음절 길게 끌었다. "술을 마시면 더 편안하지, 좋은 곳에 산다고 꼭 편안한 건 아니야."
"억지는." 해련이 말했다.
방정란은 또 웃었다.
술이 너무 좋고, 간식은 너무 달고, 달빛은 부드러웠기 때문인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전에 없이 평화로웠다. 화제는 힐월절부터 시작하여 동주부터 남경까지 한가로운 이야기가 이어져 마치 옛 친구 같았다.
"지금도 동주 힐월절에서는 천등을 띄워?" 해련이 물었다.
"띄워, 하지만 수도를 지금으로 옮겨서 풍습은 조금 달라. 화등이 아니라 선등을 띄우지." 방정란은 손으로 크기를 가늠했다. "이 정도. 물론, 세가 자제들이 띄우는 선등은 평민백성과는 달라. 나는 이전에 사람 반 만한 선등을 봤는데 찬란하고 화려했고 돛대 위에는 위풍당당하게 쪽지가 걸려 있었어."
"뭐라고 썼어?"
"아무개에게 경고한다, 빌린 돈을 갚는 것은 변치 않는 진리다."
해련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방정란은 해련의 웃는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힐월절은 태연에서처럼 재밌지는 않아, 장도 작고 야간 통금도 있어. 거기다 소월방의 떡이 없어서 재미가 떨어졌지."
소월방은 당시 태연성에서 가장 유명하던 가게로, 힐월절이 되면 특별히 계절에 맞는 계화떡과 팥치즈를 내놓았다. 방정란이 이렇게 말하자 해련의 혀 끝에서 그 달콤한 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너도 어렸을 때 좋아했어?"
"안 좋아하는 게 어디 있었겠어? 내 어머니는 내가 충치가 생길까봐 그집 떡에 미약이 발라져 있었어 많이 먹으면 유괴범이 냄새를 맡고 서륙으로 잡아가 고생을 하게 된다고 했어." 방정란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내가 숨어서 먹었지. 그녀가 보지 못하게 하고, 유괴범들이 냄새를 못 맡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방정란은 외모가 좋을 뿐 아니라 목소리도 나지막하여 부드러웠는데 이때는 술기운이 돌아 낮아져 매혹적이었다. 그가 흥미진진하게 해련에게 옛 일에 대해 말핼 때 눈빛은 되려 조금 멍했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해련의 얼굴을 너머 그의 등 뒤의 그 겹겹이 자리한 이역의 고향이 있는 바다의 저편을 보고 싶어하는는 듯했다.
해련 역시 방정란을 응시했다.
이 사람 아마 취했을 거야. 그는 생각했다.
눈 앞의 사내는 여전히 평소 익숙하던 여유롭고 교활한 모습이었지만, 어째서인가 해련은 방정란이 오늘 밤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디가 다른지는 말할 수 없어 아예 정리했다——취했다.
취한 사람만이 무심코 이런 무방비한 표정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잔의 술이 곧 바닥을 보이게 되자 해련은 한 입에 털어버리고 화제를 바꾸었다. "안타깝게도 여기에선 동주 명절을 지내지 않아. 네가 몇 달 먼저 티수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응?"
"해신절海神节을 놓치지 않았을 거야." 해련이 말했다.
전설에 따르면 매년 다섯 번째 삭월에 윤해의 해신이 삼 일간 순찰을 나오는데, 그 모습이 흉악하고 목숨을 잃을 우려가 있어 옛부터 어민들이 3일 간 돛을 내리고 항구로 돌아오는 규칙을 정했다. 아무리 흉악한 해적이라고 해도 섬을 찾아 몸을 피했다. 점차, 해신을 피하는 3일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3일이 되었고 해신절 역시 남경 여러 나라의 가장 성대한 제전이 되었다.
해련은 방정란처럼 작은 일도 생동감있게 말하지 못했다. 그는 빈 잔을 물고 갑자기 조금 맥이 빠졌다. "……사실 비슷해, 다들 핑계를 대고 즐거움을 찾고,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폭죽 보고, 춤추고. 어디든 똑같지."
"네가 그렇게 말할수록 더 보고 싶네. 올해는 늦었지만 그래도 내년이 있어." 방정란은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네가 처음으로 내게 티수를 소개해 준 거야."
이 말은 이전에 자신이 이 사람을 오브라이언에게 내던졌던 일을 떠올리게 했다. 해련은 목이 메었다. "넌 애당초 내 가이드가 필요 없었잖아."
"달라, 이전에 말했잖아. 내가 구몽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너 뿐이니 당연히 네가 하는 말을 더 듣고 싶지. 우리는동료잖아." 방정란은 이 말을 할 때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그는 상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말했다. "해련."
마지막 두 자는 목소리가 가라앉고 부드러워서 짜릿한 열기가 해련의 귓가를 스쳤다. 젠장, 이건 전혀 동료를 부르는 어조가 아닌데. 그것보다는……. 꼬마 해적은 깜짝 놀라 순식간에 놀란 고양이처럼 뒤로 물러나 맞은편의 남자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해련은 상대의 또 음모를 달성했다는 웃는 얼굴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고, 놀란 고양이는 털을 부풀린 고양이가 되었다. "방정란, 술 기운 믿고 미친 척 하지 마!"
"그래, 그래. 안 놀려." 방정란은 성과를 거두자 물러났다. 그는 해련을 향해 병을 흔들었다. "조금 남았어, 줄까?"
"안 마셔." 해련은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가 그래도 한 마디 덧붙였다. "어쨌든, 오늘 술하고 연고 고마워."
방정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네게 고맙다 해야지."
그의 이 고맙다는 말은 유난히 진지하여 이전의 경박한 희롱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해련은 어떻게 말을 받아야 할지 몰라서 아예 받지 않았다. 그는 누각 앞에서 문을 열었고, 열쇠가 자물쇠 구멍을 한 바퀴 돌았을 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방정란은 그를 등지고 아직 제자리에 앉아있었다. 남실거리는 달빛 아래에서 바라보니, 동주인의 뒷모습은 어쩐지 적막하고 고요했다. 해련은 상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는 살짝 입술을 움직였으나 결국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
해련은 방으로 들어가 먼저 상처를 씻고 약을 바른 뒤에야 나무침대에 누웠다. 술기운과 피로 탓에 그는 금방 잠에 들었다. 깊은 잠에 빠질 때 어느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가 건드리지 못하게 했던 잔은, 누구에게 주는것인가. 그는 흐릿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처음으로 방정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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