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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해중작海中爵

해중작 - 29. 믿음

"네가 왜 가? 날 감독하러?" 해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널 도와주러." 방정란이 말했다.         

"너 주제에?" 청년의 시선은 방정란의 얼굴에서 상대의 몸으로 향했고, 방정란이 걸친 고급스러운 은실 셔츠를 보고 비웃었다. "방 작은 도련님이 사귀만에 도착하기도 전에 뼈도 안 남을까봐 걱정인데."

방정란은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번 해전 때 너희 독벌호를 토벌한 게 나였지."

해련 "……."

"난 분명 너와 날 돕기 위해 가는 거야." 방정란은 드물게 설명했다. "만약 네가 혼자 힘으로 적의 소굴에 뛰어드는 게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네가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무슨 방법?"

"그건……." 방정란은 말을 길게 끌었다. 그는 늙은 말의 고삐를 끌어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해련은 들으며 손가락으로는 품 안의 새 옷을 만지작거렸고 방정란의 말이 끝날 무렵에 그의 손가락은 이미 옷감 속으로 들어갈 것 같았다. "이렇게만 하면 돼?"

"대체로 그렇고, 나머지는 임기응변이지."

"날 어르지 마, 네 계획은 분명 절반 뿐이잖아."

"확실히 내가 절반만 생각했어. 다른 절반은 먼저 뜸을 들이는 걸로 하자, 그래도 돼?" 방정란은 다시 그 익숙한 여우의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해련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상대의 이런 표정이었다. 그는 마음대로 하라는 손짓을 한 뒤 고개를 돌렸고 다시는 방정란을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비틀비틀 신명궁에서 완안나 구로 돌아왔을 때는 마침 환락가의 장사가 절정에 이를 시점이었다. 금령화 부인 쪽에는 마차를 세울 곳이 없었고, 방정란은 말을 진주 술집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여주인은 먼저 이 낡은 마차가 두 대 분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여 받아주지 않으려 했고, 또 이 늙은 말이 언제라도 병에 들어 죽을 것 같은 모습에 마굿간에 두면 재수가 없다 하여 방정란에게 두 배의 돈을 받아냈다. 방정란은 자신이 가난한 사람의 옷을 몇 벌 사입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돌아갔고, 막 머무는 곳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해련이 아직 문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방정란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손 안의 물건을 건네주었다.

"오브라이언이 먼저 절반만 갚는다고 했고, 나머지도 아마 곧 줄 거야. 그는 사실 부지런한 사람이야, 운이 안 좋아서 그렇지." 그는 방정란이 입을 열려는 것을 보자 한 마디 덧붙여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사촌동생 어쩌고 하는 말은 하지 마. 네 돈은 네가 보관해."

방정란은 웃으며 재빠르게 돈주머니를 품에 넣더니 다른 손에 있는 물건을 보았다. "이건 뭐야?"

"대극장 표. 그가 네게 주는 거야, 이자인 셈 치래."

방정란은 창가의 빛을 빌려 그 위의 글자를 보았고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잘못 기억한 것이 아니면 진유옥과 자신이 다음에 만나기로 약속했던 것이 바로 이 《호숫가의 은 열쇠》에서였다. 그는 해련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상대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한 장만 줬어?"

"두 장."

"그렇다는 건 너도 갈 거야?"

"응." 해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에게 약속한 일은 반드시 해내야 한다.

방정란은 속으로 안타까움의 한숨을 쉬면서도 입으로는 웃었다. "날 대신하여 그에게 고맙다고 해줘, 만약 그날 내가 다른 일이 없으면 나도 가서 그를 응원한다고."

상대의 이 대답은 불분명했고 해련 역시 자신이 어떤 대답을 받는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물건을 건네기만 하면 된다. 청년은 가려고 하다가 잠시 생각을 하곤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난 아직 네가 방금 말했던 계획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응?" 방정란은 눈을 깜빡였다. "어디가 좋지 않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아니, 난 너만큼 똑똑하지 않아, 그렇게 빙빙 돌려 생각하진 못해. 네 계획은 좋아."

"그러면……."

"나는 원래 돈을 받고 일을 해주고 너와 털어버리려고 했어, 그러니 네가 이전에 너와 내가 동료니 어쩌니 했던 소리는 개뿔 귀담아 듣지 않았지." 해련은 방정란의 눈을 직시하며 무척 직접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만약 정말 네 계획대로 사귀만에 가면 내 생명을 네 손에 맡기는 셈이야. 방정란, 너 어떻게 날더러 널 믿으라고 할 거야?"

"이 문제게 네게 중요해?"

"중요해, 가장 중요해." 해련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이 거리는 사실 이런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좋지 못했다. 두 사람과 벽을 사이에 둔  반대편에는 술, 밝은 등불, 야만적인 성욕과 관계가 있었고 금령화 부인의 날카로운 웃음소리는 어떤 시끄러운 큰 새처럼 밤하늘을 맴돌며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과 거리를 사이에 둔 반대편에는 기침, 원망, 질병과 빈곤이 있었고 다리가 잘린 사내는 아내를 욕하고 아이는 울며 평생을 빨아도 다 빨지 못할 것 같은 옷을 빨았다.

이런 곳에서는 생명을 건 약속도 하지 말아야 하고 깊은 애정도 탄생하지 말아야 한다. 

방정란은 웃음소리와 울음소리 가운데 시선을 내렸다. 왜 이렇게 엉망진창인 곳에서 해련 같은 사람이 태어났을까. 그는 본래 해련이 작디 작은 실마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고치의 실을 벗기고 싶어서 그를 탐색하고, 다가갔고, 반 쯤 농담하듯 희롱한 것이나 꼬마 해적이 분명 분노했으면서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시비를 구분했을 때 그에 대한 흥미는 진작 호기심의 범위를 넘어 더욱 모호하고 위험한 경계로 접어들었다.

이성이 그의 행동을 저지하기 전 방정란은 이미 해련의 손을 움켜쥔 뒤 천천히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눌렀고 해련의 놀란 눈동자 가운데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두 시간 전 부딪혔던 이마가 다시 닿았으나 이번은 무척 가벼워 마치 연인이 친밀하게 정을 나눌 때 이마에 키스하는 것 같았다.

방정란은 웃으며 말했다. "이것에 기대어, 날 믿어."

 

36.

 

다음 달 방정란이 대극장 문 앞에 이르기 전까지, 그는 다시는 해련을 보지 못했다.

 

그는 본래 그 밤 꼬마 해적이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꽁무니를 빼고 그를 피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지붕 위의 꽉 닫힌 대문을 보며 순간 상대가 이사를 간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하지만 어젯밤 그와 주불의가 술집에서 한 잔 하고 있을 때 상대는 어느 틈엔가 구몽성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의 어느 지구의 총독이 집에 돌아가는 길에 죽었다는 것을 언급했다.

"깔끔하게 죽었지, 한 방에 딱. 이 일을 한 건 분명 베테랑이야,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뒷수습을 할 줄도 알아서 시체가 거리에 널려 있게 두지 않았어. 아침 일찍 주정뱅이가 쓰레기더미에서 눈을 떴을 때 곁에 한 사람이 늘어난 걸 알게 된 거지. 재미있는 건 이 사람이 죽고 삼 일 뒤에 티수가 기밀 편지 한 통을 얻었다는 거야." 주불의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원래는 이 관원이 지니고 있던 거였겠지."

"무슨 기밀 편지?"

"몰라, 내 정부가 알아내지 못했어." 주불의는 고개를 저었다. "베갯머리 송사라는 게, 너무 심해지먼 머리가 아프거든. 수지가 안 맞아. 그들은 다 이 일이 독전갈 호박이 한 짓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아."

어째서인지 방정란은 까닭 없는 직감이 들었다—— 해련이 한 짓이다. 방정란은 깨달았다. "편지가 바로 국왕의 손에 나타난 게 아니라서?"

"맞아." 주불의는 손가락을 세웠다. "시모나라는 백작이 얻은 거야."

"이 사람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유명인사지, 권세도 대단하고. 만약 누가 절름발이 국왕의 신발을 제일 깨끗이 핥을 수 있는지 대회를 연다면 그가 분명 일등을 할 거야." 주불의는 마지막 술 한 모금을 비우고 견과류를 먹기 시작하며 입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진유신의 냄새나는 발을 많이 핥아본 경험이 있는 내 직감으로는, 이 사람에게는 문제가 있어—— 어쨌든 소인과 간신이 되기에도 기술이 필요하거든. 그는 너무 나갔지. 예를 들어볼까, 지금 국왕의 여자…… 어, 더욱 정식 칭호를 쓰자면 연인이지. 난드 부인이라는 여자인데 처음에는 이 여자가 대극장의 댄서였다가 시모나 백작의 마누라가 됐고, 그 이후에 국왕이 그의 마누라와 잤는데 이 백작은 아무런 티도 안 냈을 뿐 아니라 허리를 굽혀 자기 여자를 황궁으로 들여보냈어."

"어쩌면 기개 없는 사람일 수도?"

"방 천위, 다 아는 사람끼리 왜 이래." 주불의는 불만스러웠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방정란은 웃으며 직접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쉽지 않지. 국왕이 총애하는 신하고 천금을 하사해도 욕망을 채우기는 힘들고 난드 부인이 그렇게 경국지색인데도 그대로 바칠 수 있었어. 돈과 미색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어. 우리 쪽에서 적어도 생각을 잘 해야 그를 터트릴 수 있어." 주불의는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건 '진정한 그' 말이야."

"알아." 방정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난 진유옥을 만나러 갈 거야, 그에게 방법이 있을지 보자고."

주불의는 즐거워했다. "방정란, 너처럼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은 대 간상大奸商이 되어야 해."

"간상이 어디 간신만큼 이득이겠어?" 방정란은 웃으며 술값을 탁자 위에 놓고 자리를 떠났다. 잠시 뒤 그의 등 뒤에서 놀란 비명이 들렸다. "——방정란, 이 자식 자기 술값만 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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