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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해중작海中爵

해중작 - 32. 오누이

38.

 

해련은 본래 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거리는 소리 속에서 제5막까지 버틸 수 있을 줄 알았으나, 결국 자신이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누군가 다가와 그를 깨울 때에도 청년의 눈꺼풀은 여전히 미련을 품고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등받이에 기대 몸을 고쳐앉은 후에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고 목소리는 나른했다. "누구야……."

"오빠."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우며 약간의 억울함과 연약함을 지니고 있었으나 해련의 귀에는 천둥소리 같았다. 청년의 가늘게 뜨여있던 눈이 순간 휘둥그레 커졌고, 그는 두말 않고 일어나 떠나려 했으나 소녀는 급히 그의 소매를 쥐었다. "오빠……."

울음기가 어려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해련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이번에는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았고 길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왕녀 전하를 따라서 왔어." 소어는 위쪽을 가리켰다.

"그러면 뭐하러 내려왔어?"

"난……." 해어는 우물거렸다. "오빠 보려고."

"지금 봤으니까 돌아가." 해련은 손가락을 따라 위쪽을 바라보곤 말을 반복했다. "돌아가. 네가 여기 있는 건 좋지 못해."

"뭐가 좋지 못해?"

"내가 전에 데려다 줄 때 말했지." 여자 아이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아직 해련의 소매를 쥐고 있었고 해련은 그녀의 손가락을 떼어 놓을 용기는 없어 차가운 말로 그녀가 손을 놓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오빠라고 부르지 마, 해어 아가씨."

"날 뭐라고 불렀어?!"

해어의 아몬드 같은 눈동자에 순식같으 옅은 물안개가 끼었다. 그녀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힘껏 고개를 들었고 해련은 상대의 깨끗한 눈빛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 "방금 날 뭐라고 불렀어?"

"……." 해련은 방금 말을 꺼내고서 벌써 후회했다. 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오빠가 날 바둑판 거리로 보낸 이후로 날 만나러 오는 횟수가 점점 적어졌어. 부인은 오빠가 바빠서 그런 거라고, 돈 버느라 바쁘다고, 내 혼수를 버느라 바쁘다고 그랬어—— 하지만 나는 혼수 같은 건 필요 없어! 예전에 양뿔 골목에 살 때는 문턱에 앉아서 오빠가 돌아오길 기다렸어. 비록 뱃속은 비어 있었지만 마음은 가득 차 있었어. 지금은 그들이 나를 공부시키고 글을 가르쳐주고, 배를 곯을 필요도 없어졌어. 봐, 왕녀 전하가 오늘은 내게 귀걸이를 주셨어." 해어의 말은 빠르고 다급해졌고 귀의 정교한 진주 귀걸이 역시 그에 따라 살짝 흔들려 마치 그녀의 떨리는 손가락 같았다. "나는 이전에는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던 생활을 보내고 있지만 나는 뭔가 늘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녀는 다시 한 걸음 나아갔고 해련은 물러날 곳이 없어 소녀가 머리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기대는 것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빠, 내가 필요 없어?"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해련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소매를 쥔 여동생의 힘은 결코 세지 않았다. 그가 떨쳐내고자 한다면 먼지를 터는 정도의 힘도 필요하지 않을 테지만 그는 할 수 없었다. 마치 그가 해어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것처럼.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해련은 자신과 아버지, 동생이 서로 의지하며 이 이국의 땅에서 태연성에 있을 때처럼 편안한 생활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실종되었고 그는 겨우 열두 살이 넘었으며 소년이라고도 할 수 없는 꼬마였으니 여섯 살의 여자 아이를 데리고 구몽성에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과 해어가 구몽성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생존할 기회를 찾고 싶었을 뿐이었고, 먹고 사는 것만 해도 이미 온 힘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백호방에 몸을 의탁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는 거의 주저 없이 칼을 쥐고 걸어갔다.

그는 이전에는 백호방에 고마워 했다. 백호방이 그를 개처럼 부려먹기는 했으나 적어도 그에게 살 기회를 주었다. 그는 약간의 본능과 칼 한 자루, 천한 목숨 하나에 의지하여 그 승냥이와 맹수 같은 악인들 가운데 죽고 죽였고, 이것으로 동생에게 양뿔 골목의 작은 집 한 채, 흰 치마 한 벌과 며칠 간격으로 고기를 한 끼 먹게 할 수 있었다. 그는 점차 나아질 것이라 생각했고 언젠가 충분한 돈을 벋어 해어를 데리고 이곳을 벗어나 안정적이고 편안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해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희망과 바람은 그날 밤 침대 발치에 웅크리고 앉아 훌쩍이는 작은 몸과 흰 치마의 얼룩진 핏자국을 본 찰나 산산히 부서졌다.

설령 이미 삼 년이 지났다 해도 해련은 한밤 악몽 속에서 여전히 이 장면을 보았다. 그가 더러움 속에서 그 오랜 세월을 발버둥쳤던 것은 동생에게 이런 것들이 묻지 않길 바라서였다. 그녀는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고, 아버지가 잘 보살펴야 한다고 수천 번 당부했던 여동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생이 가장 절망하고 도움을 구할 수 없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는 자신이 진작 비정상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날 밤의 부채감은 거의 그를 비정상에서 미치광이로 만들었다.

 

네가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널 데려갈 수 없는 거야. 네가 날 따라오면 더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네가 만약 요노르 부부의 아이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쁜 옷을 입을 수 있고 한 끼를 굶고 한 끼를 먹지 않아도 되고, 심지어 나보다 더 좋은 오빠가 있었을 텐데.

혹은 네가 좀 더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파도의 흔들림에 놀라 겁을 먹거나, 다음 순간 해적이 쏜 포탄이 허공을 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거야. 그랬다면 어머니도 난산으로 죽지 않고, 우리 온 가족이 구몽성에서 태연성에 있을 때와 같은 나날을 보냈을 거야. 어머니아 만든 스프는 무척 맛있어, 네가 먹어봤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이런 말들은, 해련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다음 막이 곧 시작하고 점점 더 많은 관중의 시선이 이 굳어 있는 오누이에게로 향했다. 구석을 지키던 하인 역시 무슨 일인가 물어보려 했고 해련은 입술을 오므리다 결국 말했다. "지금 몇 막이야?"

해어는 아, 하더니 곤혹스레 고개를 들었다. "곧 제6막이 시작해."

해련은 그 말에 한숨을 쉬었다. 이미 오브라이언의 성과를 놓쳤으니 계속 여기 있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계속 볼 거야?"

해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봐."

"그럼 나가자. 할 말이 있으면 나가서 해." 해련은 다른 손을 천천히 들어 천천히 소녀의 손가락 끝을 쥐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약속했다. "네가 필요없는 게 아니야."

 

39.

 

방정란은 지금 어째서인지 조금 초조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진유옥과 함께 눈앞의 신분이 고귀한 여자들을 칭찬하며, 나아가 옆에 있는 시녀들과 관계를 맺어두어야 하는 것을 알았다. 황실의 숨겨진 비밀에 대해 알게 되면 더 좋을 수 없고, 마지막에는 때를 봐서 재미를 보고 물러나면 이번 조수 역할은 크게 성과를 얻은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첫 번째 걸음도 제대로 내딛지 못했으며 눈길은 참지 못하고 난간 아래로 향했으며 마음은 어디로 향하는지 더욱 알 수가 없었다.

방금 그 여자 아이…….

방정란은 높은 곳에 있어 아래층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여자 아이가 해련을 깨우는 것을 보았을 때, 남자의 손가락은 살짝 움직였다.

"뭘 보고 계신가요?" 롱롱이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방정란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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