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

(258)
해중작 - 31. 소어 37. 해련은 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후회했다. 그가 백조구에 드나드는 횟수는 적지 않았으나, 모두 자유로운 고니처럼 나다녔고 두려운 것도 신경 쓰는 것도 없었다. 지금은 봉황 무리에 참새가 스며든 것이라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해련은 억지로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눈을 너무 빠르게 깜빡거리지 않으려 했고 자신이 너무 진흙구에서 온 진흙처럼 행동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줄곧 칼을 잡아 굳은살이 배긴 손가락이 광택이 매끄러운 비단 방석에 닿았을 때 청년의 얇은 눈꺼풀은 저도 모르게 떨렸다. 그는 자신이 용모를 단정히 하고 몸의 핏자국을 닦고 좋은 옷을 입어도 여전히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방금 그의 곁을 지나치던 모든 나리부인들의 시선은 있는 듯 없는 듯 그에게 꽂혔고 조심스레 그와 반 척의..
불견상선삼백년 - 14. 명경 마차가 춘번성을 지날 때 바깥에는 눈송이가 흩날려 분분히 마차 안으로 날아들었다. 소복훤이 칼자루를 흔들자 천이 미끄러지며 떨어졌다. 창 위에는 두꺼운 모전이 붙어 있어 마차 밖의 하늘빛을 완전히 가리자 안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화 가의 마차 안에는 무엇이든 다 있었는데, 담요는 가지런하게 개어져 있었고 탕파 안은 영약으로 훈향한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오행설은 소매 속에 배에서 가져온 손난로를 넣고 차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따뜻하고 어둑한 곳을 좋아했는데, 혼곤히 잠이 오고 편안해서였다. 그는 손난로를 끼고 있었고 곧 잠에 들 것 같았다. 그러나 눈동자는 반 정도만 감겨 있었고 시선은 긴 눈매 사이에서 마차 문가의 큰 그림자로 향했다. *** 사실 의오생은 틀리지 않았다. 오행설..
해중작 - 30. 왕녀 롱롱 방정란에게는 지금 그럴 듯한 추측이 생겼다. 시모나라는 백작 자신이 야심이 있든지 아니면 뒤 어두운 곳에 숨어 호시탐탐 호박왕의 세력을 노리든지 간에 그는 반드시 한 번 만나봐야 했다. 주불의가 말했듯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서 그는 두 개의 옵션을 준비해야 했다. 그는 대극장 앞에 서서 이것저것 생각하다 해련이 그에게 준 표를 품에 넣고 다른 표를 한 장 꺼냈다. 티수의 연극은 예로부터 유명했다. 한때는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고 영웅을 노래하던 가무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귀족들의 한가할 때의 오락 활동이 되었으며 엄숙한 축사와 기도 역시 변화무쌍한 이야기와 포복절도할 연기가 되었다. 그리고 대극장은 구몽성에서 가장 호화로운 공연 장소로, 자연히 관중의 사랑을 받았다. 방정란이 입장권을 내자 문 앞을 지키..
불견상선삼백년 - 13. 탐혼 "이건……." 오행설의 시선이 상자 안으로 향했고, 잠시 바라보다 소리를 내었다. 의오생은 멈칫하여 "오." 대답했다. "이건 몽령입니다." 몽령은 인간 세상에서 보기 드문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서남 일대에 무척 번화한 장터가 있었는데 매년 3월 초사흩날에 등을 밝혀 장터를 열었고 등불은 십이 리를 이어져 군산을 비추었다. 언뜻 보기엔 마치 하늘의 불이 인간 세상에 떨어진 듯하여 한 번 불이 붙으면 사흘 밤낮을 이어졌다. 그 군산은 낙화대落花台라고 불렸고 그 장터는 낙화산시落花山市라고 했다. 안에는 각종 기괴한 물건들이 있었는데 가장 처음에 몽령도 거기에서 왔고, 그 후에는 몽도, 랑주를 한 차례 휩쓸었다. 이 물건은 사실 정교하고 귀여워 길한 것이었다—— 말하기로는 몸에 지니고 있으면 평안을 지킬 수..
불견상선삼백년 - 12. 몽령 화 가의 제자들의 눈에 가주 화조정은 이미 자신의 검을 건드리지 않은지 오래였다. 선도가 없어진 뒤, 선문에서 선문에서 가장 비승에 가까워진 몇 명은 인간 세상의 지극히 높은 자가 되어 아무도 적대하지 못했다. 비록 최근 몇 년은 사마가 횡행하여 갈수록 거리낌이 없었으나 매번 토벌할 때는 선문의 힘을 모았고, 정말 화조정이 진지하게 검을 뽑아야 할 상황은 드물고 또 드물었다. 지난번은 아주 오래 전 가명지야葭暝之野에서였다. 화 가와 조야성 사람들이 좁은 길목에서 마주쳤다. 흑보살은 성주 오행설의 무슨 악업을 도왔는지, 화조정의 검에 가로막혔다. 화조정은 검으로 이 길을 걸었고 비록 평소에 말을 할 때에는 예의가 있고 겸손했으나 그것은 가주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며 문파의 사무를 상대하여 길러낸 기질이었다..
해중작 - 29. 믿음 "네가 왜 가? 날 감독하러?" 해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널 도와주러." 방정란이 말했다. "너 주제에?" 청년의 시선은 방정란의 얼굴에서 상대의 몸으로 향했고, 방정란이 걸친 고급스러운 은실 셔츠를 보고 비웃었다. "방 작은 도련님이 사귀만에 도착하기도 전에 뼈도 안 남을까봐 걱정인데." 방정란은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번 해전 때 너희 독벌호를 토벌한 게 나였지." 해련 "……." "난 분명 너와 날 돕기 위해 가는 거야." 방정란은 드물게 설명했다. "만약 네가 혼자 힘으로 적의 소굴에 뛰어드는 게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네가 안전하게 몸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무슨 방법?" "그건……." 방정란은 말을 길게 끌었다. 그는 늙은 말의 고삐를 끌어 방향을 바꾸게 하는 것..
해중작 - 28. 만찬 33. 주방장은 돌아가 항구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남편에게 내일 아침 밥을 준비해줘야 하기 때문에 그릇을 정리하고 나가려던 찰나 해련 일행 두 명을 마주쳤다. 여인은 그들에게 인사를 할 때 저도 모르게 놀랐다. "머리가 왜 그래요?" "괜찮습니다, 방금 방에 불이 없어서 어둠 속을 더듬다 부딪혔어요." 방정란은 눈을 뜨고 헛소리를 하는 것이 가장 능했다. 분명 문 옆 낮은 캐비닛의 촛대가 있고 창 밖에도 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다 해련은 그보다 머리 반 개가 작아서 까치발을 하지 않으면 두사람은 이마와 콧대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자작 댁 주방장은 거친 사람이라 그리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조심하라고 한 뒤에야 걸음을 떼었고, 갑자기 고개를 돌려 웃더니 한 마디 물었..
불견상선삼백년 - 11. 경위 화조정과 화 가 제자들은 그 눈보라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소복훤이 막 장벽을 치우려다 그 말을 듣고 손을 멈추었다. "아니 된다고?" 의오생은 얼굴을 굳혔다. "그가 듣게 해선 안 됩니다." "그대의 가주에게도 문제가 있소?" "그와 저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일이 이미 오래되어 뿌리가 깊으니 놀라게 해선 안 됩니다." 오행설은 그의 잔혼만 남은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일이 오래되었다는 건 얼마나 오래되었다는 겁니까?" 의오생은 침묵하다가 잠시 후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십 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벌써 이십 여 년 전이었다. *** 그날, 의오생은 애도爱徒 아요를 데리고 청심당에서 새로운 약을 달이고 있었다. 선문 사람들이 즐겨 쓰는 단약은 종류가..